방송작가

지금 이 작품

버티는 자들의 이야기

MBC <미치지 않고서야> 정도윤 작가

 김선미 편집자

지금 이 작품

버티는 자들의 이야기

MBC <미치지 않고서야>
정도윤 작가

김선미 편집자

고백하자면 이 드라마를 볼지 말지 적잖이 고민했다. 하루 종일 버티다 겨우 도망쳐 나왔는데 또 사무실 전경을 보면서 그 긴장감을 함께 느껴야 한다고? 잠깐, 인사담당자와 개발자의 이야기라… 어디에나 있지만, 딱히 중심이 됐던 적은 없었던 이들의 이야기가 내심 궁금해지던 차에, 그것도 n년차 베테랑들의 이야기란다. 이 전쟁터에서 나의 몇 배의 세월을 견뎌낸 선배들은 어떤 모습이고 또 어떤 선택을 어떻게 해나갈까. 머지않은 나의 미래의 모습을 엿보게 될까. 증폭되는 궁금증을 이기지 못해 화면 앞으로 갔고, 위로를 받고 말았다. 눈물겨운 버팀의 투쟁기를 유쾌하고도 따뜻하게 그려낸 정도윤 작가와 서면으로 만났다.

격변하는 사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n년 차 직장인들의 치열한 생존기를 그린 드라마 <미치지 않고서야>. 제목처럼 미치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는 직장생활의 애환을 담아내며 대한민국 직장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몇 년 사이 직장생활을 소재로 드라마, 예능 전반에서 다양하게 선보여지고 있는 오피스물. 그간 사회초년생들의 사회 적응기나 실무자급 연차 중심의 이야기가 주를 이뤘던 것과는 달리, <미치지 않고서야>는 이제 내리막길에 들어서는 높은 연차들이 중심이 되어 극을 이끌어가며 ‘중년판 미생’으로 불리기도 했다.

직장인들이 공감할만한 일 이야기를 써보자고 생각했어요. 이직과 퇴사, 해고는 모든 직장인의 고민이잖아요. 심지어 가족의 생계가 걸린 선택이니 나름 극성도 지녔고요. 다만 퇴사나 해고를 다룬다고 해서 자칫 연민이나 신파로 빠지거나, 지금까지 봐왔던 노사 간의 심각한 갈등으로는 가지 말자고 생각했어요. 하루 종일 일하고 피곤한 상태로 퇴근했는데 우울한 직장 이야기를 또 보고 싶은 시청자들은 없을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소소한 역경과 고난 속에서 힘들다 징징거리지 않고, 묵묵히 자기 일 열심히 하는 중년 직장인들을 주인공으로 했고요. 이 캐릭터들에게 공감하고 응원도 할 수 있게 밝고 유쾌한 톤으로 푼다면 좋아해 줄 시청자들이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MBC 제공

2017년 <마녀의 법정> 이후 4년 만의 복귀작. 성범죄 사건을 맡아 풀어가는 여검사의 이야기로 법조계 이야기를 밀도 있게 다뤘던 <마녀에 법정>에 이어 이번 작품 역시 현실감 있는 묘사로 호평이 쏟아졌다. 문과계열에겐 생소한 분야인 가전제품 회사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라니. 직장생활 경험이 있는지, 어떤 레퍼런스들을 활용했을지 취재 과정이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직장생활을 한 적은 없어요. 참고할만한 레퍼런스도 많이 찾아봤는데, 개발과 인사 직무가 너무 생경한 분야라 개발자와 인사담당자를 주인공으로 한 16부 미니시리즈는 없더라고요.
보통의 경우라면 오피스물이니만큼 특정 회사의 도움을 받아 견학을 간다거나 상근 취재를 해야 했겠지만, 거의 모든 회사들이 코로나 때문에 외부인에게 문을 닫은 상태라 취재가 정말 힘들었어요. 심지어 가전회사는 기술 정보가 곧 회사 이익과 직결되는 곳이라 코로나가 아니었어도 그 어떠한 취재도 허가할 수 없는 곳이더라고요. 훗날 이런 드라마를 쓰게 될 줄 알았다면 공대에 들어가서 가전회사에 취직할 걸 그랬다고 후회한 적이 많았죠. 남들이 가전회사를 안 쓰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는 뒤늦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하하.

MBC 제공

‘회사가 망해도 나만은 흥해서 나가는 이직 성공기’인 만큼, 조직의 울타리 안에 있어도 본인만의 무기가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에 특정 기술을 가진 개발자를 주인공으로 해야 한다고 처음부터 생각했다는 정도윤 작가.

22년 차 노련한 개발자인 최반석(정재영 분)을 실제 존재하는 사람처럼 만들려면 일단 저부터가 개발의 아주 기본적인 지식 정도를 알아야 했어요. 회로, 센서, 메인칩, 임베디드, 신뢰성 테스트 등등 살면서 처음 들어보는 단어들의 연속이었습니다. 모르면 외운다는 문과생 마인드로 접근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관련 동영상, 오디오 클립, 개발자들 커뮤니티 등을 찾으면서 닥치는 대로 보고 듣고 필기하고 했죠. 잠자리에서도 개발 관련 교육 동영상 같은 거 틀어놓고 그랬어요. 자는 중에 무의식적으로 외워지지 않을까 싶어서요.
전담 자문해주시는 교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저와 제작사 기획팀, 보조작가들이 초등학교 동창, 사돈의 사촌, 친구의 친구 등등의 인맥을 총동원해서 개발자분들을 어렵게 찾아 취재했어요. 특히 저희 보조작가들은 코딩만 배우면 바로 가전회사에 취직해도 될 만큼 애정을 갖고 정말 열심히 일해주셨죠. 정성은, 서영난, 표승민 세 분의 노고에 꼭 감사를 전하고 싶어요.

<미치지 않고서야>를 이루는 양대 축은 ‘개발’과 ‘구조조정’이다. 첫 회부터 권고사직 장면으로 등장하는 인사담당자 당자영(문소리 분)은 사람들을 몰아내야 하는 입장에서 역으로 내몰리는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버티려는 반석과 그걸 꺾어야 하는 자영의 구도, 그리고 두 베테랑의 전략적 공생에서 빛나는 n년 차들의 내공은 극을 끌어가는 큰 힘이기도 하다.

인사담당자 당자영 캐릭터는 4, 5년 전 읽은 기사에서 모티브를 얻었어요. 당시 금융권에 희망퇴직 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던 시기였고, ‘고인 물’들을 내보내기 위해 억대 위로금, 호화 여행상품권 등등 온갖 아이디어를 짜내는 인사팀에 대한 기사였는데 ‘오, 이거 재밌다’ 싶었죠. 떠밀려 나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봤지만 떠미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없었잖아요. 또 제 주변에 보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40대 여성 가장들도 많은데, 드라마에서는 별로 다루어지지 않은 것 같아서 이 둘을 녹여서 당자영을 만들게 됐어요.

MBC 제공

문과 출신에, 나이로도 경쟁력이 없었던, 여성, 당자영은 마지막 회에서 이과 출신 남성 개발자들을 이끄는 수장이 된다. 대비되는 양상만큼 큰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면서도 결코 현실성 떨어지는 해피엔딩이 아니라는 점에서 반가운 지점이다.

오피스물에 어울리는 엔딩이면서도 시청자들에게 판타지를 선사하고, 또 그러면서도 캐릭터 개연성에 어긋나지 않는 적당선이 필요했어요. 비록 회사는 매각돼서 사라지지만 주인공은 나가서 잘됐으니 판타지가 된 것 같고, 워커홀릭인 반석은 자신이 차린 회사의 CEO 자리를 자영에게 맡기고 물러나 개발자로서의 일에만 전념하는 그 캐릭터다운 선택을 하죠. 나름 삼박자가 맞는 엔딩이라 저도 좋았습니다.

“일단, 오늘도 버텼다.” <미치지 않고서야>의 등장인물들의 공통적인 모토는 바로 ‘버티기’였다. 물러설 곳도 없고 한껏 복잡해져 버린 상황에서도 당사자들의 목표는 단순했다. 일단 버티는 것. 그 단순한 목표 하나로 움직이는 인물들의 결정과 행동, 심리 변화 등이 섬세하게 묘사된 것을 보면서 작가가 겪었을 버팀의 시간도 궁금해졌다. 어려서부터 TV, 특히 드라마를 너무 좋아해 방송업계 언저리에서 일하다 공동작업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는 정도윤 작가. <여우누이뎐>, <동안미녀>를 공동집필 해 KBS 극본공모에 제출, 둘 다 최종심까지 올라갔고 방영까지 하게 돼 2010년 데뷔에 이르렀다. 이후 SBS <엄마의 선택>, KBS <마녀의 법정>을 선보이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언뜻 보기엔 순탄해 보이는 여정이지만, 매 작품 우여곡절을 겪기는 마찬가지였다.

지금도 버티는 중이에요. 뭘 모르는 지망생 때는 데뷔만 하면 고생 끝인 줄 알았어요. 기성작가님들이 너무 대단해 보였고, 저렇게 성공하셨으니 앞으로 쭉 탄탄대로일 거라고 부러워했었죠. 근데 저도 방송을 해보니 뭐 하나 순조롭게 넘어가는 것이 없더라고요. 기획부터 편성, 캐스팅, 온에어의 모든 순간들이 산 넘어 산이고, 힘들어서 하산하고 싶어질 때도 있고요. 불안하고 초조한 것도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 듯해요. 버팀은 그냥 작가의 생활 그 자체인 것 같아요.

그 숙명을 받아들이고 버틸 수 있는 힘은 무엇일까.

이번 작품을 쓰면서, 작가로 일하면서 행복한 순간이 언제인지 저 스스로 물어본 적이 있는데요. 물론 제가 쓴 작품이 방영돼서 시청자들이 봐주시고 좋은 평가를 내려주실 때도 너무 행복하지만, 그건 자주 만날 수 없는 큰 행복이라 너무나 멀리 있는 것 같고… (심지어 만나지 못할 때도 있고) 그나마 가까이 있는 행복은 뭔가 막혔던 부분이 풀리거나, 보다 더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떠오르거나 그런 소소한 순간에서 오더라고요. 아이디어가 잘 풀리면 하루 종일 행복하고, 기분이 너무 좋아요.
<미치지 않고서야>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 역시 마지막 엔딩 씬이었어요. 계속 잘 안 풀리던 코드가 한 큐에 쫙 풀리는 순간 행복해하는 반석의 표정이 제 표정이기도 했거든요. 그래서 마지막 지문도 ‘작은 성취를 이루고 행복해하는 반석의 얼굴에서…’로 썼어요. 쓰고 나서 ‘아, 내가 반석이한테 이런 작은 행복을 느끼게 해주고 싶어서 16부를 달려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약간 울컥했습니다.

MBC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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