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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방송작가

재미있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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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진

  • 협회부설교육원 63기 기초반 교육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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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진

  • 협회부설교육원 63기 기초반 교육생

솔직하게 말하자면,
지난 몇 년간은 TV를 통해 드라마를 시청하는 빈도가 손에 꼽을 정도였다.
한동안 숏폼의 최전선인 플랫폼에서(지금은 전 직장이 되었지만) 콘텐츠를 다루다 보니 자연스레 짧고, 자극적이고, 엄지손가락 몇 번 슥-삭 하면 쉽게 볼 수 있는 콘텐츠들에 너무 익숙해진 탓이었다.
비교적 긴 호흡을 가지고 있는 드라마와 영화들은 유튜브를 통해 [10분 요약], [30분 안에 끝나는~] 같은 키워드로 검색해 후루룩 소비해버리고 말았다. 이런 요약본 콘텐츠마저 2배속으로 돌려본다는 요즘 세대. 나는 바로 그 세대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축약 콘텐츠를 몰아보기 하던 와중에, 알고리즘이 짧은 드라마 클립 하나를 추천했다. 버퍼 광고가 끝나고 클립 영상이 시작됨과 동시에 숨이 막힐 듯한 슬픔이 화면을 가득 채웠고, 조승우 배우가 극 중 대척점에 있는 듯한 유재명 배우에게 들으라는 듯 외치는 “왜 보고만 있었습니까!”라는 대사에 가슴이 둥둥 뛰었다. 전후 맥락을 전혀 모른 상태였기에 더 궁금했다. 왜 보고만 있었다는 걸까? 왜 싸우지 않았냐고 다그치는 거지? 중간에서 조승우 배우를 중재하고 있는 저분은 상사 역할인가? 영정 속 젊은 여자는 왜 죽은 걸까?

그다음 내가 한 행동은?
드라마 정주행!이라고 생각했다면 땡. 늘 그러했듯 <비밀의 숲> ‘요약본’을 찾아보았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올린 요약본을 보면 볼수록 이상하게 뭔가 놓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 이게 아닌 것 같은데, 이런 감정이 아닐 것 같은데. 어느 여름날 밤, 그렇게 정말 오랜만에 드라마 정주행을 시작했다. 빨리 감기도 건너뛰기도 없이 한 장면 장면에 집중한 채.

일하는 시간을 빼고, 잠자는 시간을 줄여가며(거의 뜬눈으로) 이틀 만에 70분짜리 드라마 16편을 뭐에 홀린 듯 해치웠다. 아, 그래서 이런 표정이었구나. 그래서 이런 행동을 했구나. 그럼 황시목은 여은수를 이성으로서 사랑했던 걸까? 한여진은 자신의 선택에 후회는 없었을까? 드라마가 끝난 후에도 한동안 스스로 반문도 해보고, 같은 드라마를 본 사람들이 남겨놓은 후기 글을 탐독했다. 그러면서 떠올렸다. 아, 나 드라마 보는 거 좋아했던 사람이지! 매주 주말 8시 드라마도 놓치지 않고 보던 사람, 그게 나였다.

요약/축약본에서는 느끼기 힘든 촘촘한 서사. 그 서사를 쫓아가는 과정 자체가 재미있었다. 작가가 고뇌하여 심어두었을 작은 단초들이 크게 불어나는 걸 재빨리 캐치했을 때의 짜릿함이란!(이 또한 설계된 장치겠지만!) 전혀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이야기가 뻗어나갈 때는 정말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충격도 있었다. 한 편 한 편을, 한 작품을 온전히 보았을 때 완성되는 이야기. 그게 드라마였다.

신난 나는 또 엄지손가락을 ‘슥삭’하여 대본집을 주문했고, 급기야는 영상을 틀어놓고 대본집과 비교하며 보기 시작했다. <비밀의 숲>으로 시작해서, <괜찮아 사랑이야>, <SKY 캐슬>, <스토브리그> 등을 대본집 귀퉁이를 접고 밑줄 쳐가며 열몇 편 여의 드라마를 봤을 때, 슬금슬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나도 이런 글, 이런 드라마 써보고 싶다!

형태는 달랐지만 나 역시 계속해 콘텐츠를 만들어왔다 보니 근거 없는 자신감이 솟았다. 할 수 있겠는데? 내가 쓰는 드라마는 대박 날 거야! 같은. (혹시라도 이 글을 보는 나의 작가 수업 첫 스승이신 허현미 선생님과,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끈끈한 전우애가 생긴 9반 동기들이 본다면 웃어도 할 말이 없다. 하지만 그때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귀여운 나 같으니….)

인생 드라마라 불리는 드라마 정주행을 마치고 나면, 흔히 후유증이 남는다고 표현한다.
작가로서의 나의 목표도 이것이다. 내가 쓴 드라마가 끝났을 때, 시청자들이 짧든 길든 후유증이 남는다고 표현할만한 드라마. 날카롭게 비판하여 시사점을 주는 이야기도, 소소하지만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이야기도 모두 쓸 수 있는 그런 작가가 되고 싶다. 거창한가? 써놓고 보니 꽤 거창하지만, 원래 꿈은 크게 갖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당찬 포부를 품은 나는, 올해 코로나를 뚫고 교육원에 등록하였고 날것의 초고를 꼭 쥔 채 합평 차례를 기다리는 중이다. 수업을 거듭할수록, 동기들의 단막들을 읽을수록 조금 쪼그라들긴 하지만 뭐 어때! 인물들을 만들어내 성격과 환경을 부여하고, 장소를 만들어내 그 안에서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일들을 써 내려가는 게 아직은 너무 재미있다. 그래서 유명세를 얻든 못 얻든, 꽤 오랫동안 내가 좋아하는 일이 될 것 같다. 드라마 쓰는 일은.

p.s 망생이를 꿈꾸는 분들과 제게 마르지 않는 아이디어와 영감, 끝까지 밀어붙일 수 있는 엉덩이 힘, 그리고 약간의 운이 항상 함께하길!
– 초짜 망생이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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