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작가

인생 2막

좋아서 하는 일

번역가 조은정

정윤미 편집위원 사진 인터뷰이 제공

인생 2막

좋아서 하는 일

번역가 조은정

정윤미 편집위원
사진 인터뷰이 제공

한창 치열하게 일하던 7년 차 방송작가. 각종 교양프로그램에서 착실하게 이력을 쌓아나가던 그녀가 잠시 멈춰 섰다. 그리고 자신을 돌아보았다. 마음속 열정과는 달리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꼭 지금 하는 일이 아니어도 어디에든 먹고 살 길은 있다는 의사 선생님의 조언에 큰 용기를 얻었다. 방송작가를 내려놓고 ‘번역’이라는 새로운 세계에서 인생 2막을 열고 있는 조은정 작가. 고향인 부산에 머물고 있는 조은정 작가와 서면 인터뷰를 진행했다.

방송작가를 그만두어야겠다고 결심한 후 곧장 번역 일에 뛰어드신 건가요?

방송작가로 일을 할 때도 인터뷰 번역을 직접 하기도 하고 촬영 현장에 통역으로 나가기도 했어요. 이런 경험 때문인지 방송작가를 그만둔 후 자연스럽게 번역 일을 시작하게 됐죠. 초기에는 함께 방송을 했던 분들이 번역이 필요할 때 제게 연락을 줘서 일을 얻게 됐어요. 운이 좋은 편이었죠. 하지만 아는 사람들에게만 의존할 수는 없었어요. 번역가로서 자리를 잡으려면 제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했고, 실력을 입증해 보여야 했습니다. 제가 직접 프로그램 제작진에게 이메일을 보내 번역 작업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었고요.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제 이력을 소개하고, 번역에 대한 생각들을 공유하기도 했어요. 제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태도로 번역을 하는지 알리고 신뢰를 얻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다행히 블로그를 보고 연락을 해 온 분들도 꽤 있었어요.

불규칙한 생활, 시도 때도 없는 밤샘, 마감의 압박. 방송작가로 일하는 동안 겪어야 했던 고단함으로부터 이제 해방되셨는지 궁금합니다. 번역가로서의 삶은 어떠한가요?

어찌 보면 번역가도 방송작가와 비슷한 부분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마감 시간이 빠듯한 게 가장 힘들어요. 새벽 1~2시에 연락이 와서 지금 당장 작업해 줄 수 있냐고 물어보는 분들도 계시고요. 제가 방송제작 환경을 너무 잘 아니까 다급하게 요청할 수밖에 없다는 걸 다 이해해요. 그래서 급한 번역도 가급적 해 드리려고 노력하는데, 저도 못 하게 되는 상황일 때는 괜히 더 미안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마감의 압박이 크고 밤샘을 하기도 하지만, 번역가로 사는 것에 만족하냐고 묻는다면 저는 ‘백 퍼센트 그렇다’예요. 제가 성격이 내향적인 편이라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데, 번역은 온전히 혼자 하는 작업이잖아요. 출퇴근 스트레스 없이 혼자 일에만 몰입할 수 있다는 게 번역 일의 가장 큰 장점인 것 같아요. 또 작가로 일할 때와 마찬가지로 번역가도 매번 새로운 주제를 만나게 되다 보니, 한 번도 똑같은 일을 한 적이 없어요. 그래서 긴장되기도 하지만 다양한 세계를 접할 수 있다는 게 저를 설레게 하는 것 같아요.

번역가가 되고 싶다고 누구나 될 수 있는 건 아닐 텐데요. 영어 실력은 어떻게 키우신 건가요?

어렸을 때부터 영어를 좋아했어요. 영어를 더 잘하고 싶어서 외고에 진학했고, 졸업 후엔 호주로 떠나 대학에 입학했어요. 호텔경영학을 전공했죠. 한국에 돌아와 방송작가가 되기 전에는 호텔에서 일했고, 무역회사를 다니기도 했어요. 그때도 빠지지 않고 한 일이 영어학원을 다니는 거였어요. 돌이켜 보니 영어 감각을 잃지 않으려고 꾸준히 노력했던 것 같아요. 언어라는 게 계속 쓰지 않으면 잊어버릴 수밖에 없잖아요. 번역가가 된 지금도 시간이 날 때마다 공부하고 있어요. 고전부터 신간까지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고 있고, 종이신문도 구독해서 보고 있고요. 또 번역할 주제가 정해지면 도서관에 가서 관련 도서를 찾아보고 공부합니다. 번역이라는 게 단순히 영어 문장을 그대로 한글 문장으로 옮기는 일이 아니거든요. 말의 뉘앙스와 맥락을 이해하고 그 속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우리말을 찾아내야 해요. 번역을 하다가 적확한 어휘가 떠오르지 않거나 문장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계속 고민하고 끙끙대요. 어휘와 문장에 책임질 사람이 저밖에 없으니 가끔은 외롭기도 하고요.
좋은 번역가가 되려면 결국 끊임없이 노력하고 준비하는 것밖에 답이 없다고 생각해요. 그러다 보니 작업을 하지 않는 시간에도 마음은 항상 번역 일에 가 있어요. 해외영화, 다큐멘터리, 드라마를 찾아보면서 다른 번역가들은 어떻게 번역하는지 공부하기도 하고요. 화제가 되는 강연이나 기사, 팟캐스트도 열심히 찾아보고 있어요.

‘방송작가’라는 타이틀은 내려놓았지만, 방송 일로부터 아주 멀리 떠나지는 않으셨어요. 번역가로서 방송에 참여하는 기분은 어떤가요?

제가 번역한 결과물을 방송을 통해 확인할 때 정말 큰 보람을 느껴요. 방송이 좋은 평가를 받게 되면 기분이 더 좋고요. 제가 시사교양프로그램 출신이다 보니 다큐멘터리 번역 작업을 할 때가 많은데, 다큐멘터리 번역은 참여하는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2016년부터 2019년까지 매년 KBS <요리인류> 시리즈를 번역하면서 음식의 역사를 알아가는 과정이 무척 흥미로웠고요. EBS <교육대기획, 학교> 시리즈도 2년 연속 작업을 했는데, 세계 곳곳의 교육 현장을 생생하게 볼 수 있어서 정말 유익했어요.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은 작업은 SBS <SBS스페셜 – 쇼에게 세상을 묻다> 편을 번역했을 때인데요. 당시에 제가 페루에 머물고 있어서 작업 상황이 여의치 않았어요. 인터넷 속도가 너무 느려서 영상을 받기도 힘들었고, 시차가 반대라서 제작진과 소통하기도 힘들었고요. 그런데도 담당 작가님이 제 사정을 다 이해해주고 믿고 맡겨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힘든 환경에서도 무사히 작업을 잘 마쳤고, 프로그램도 좋은 평가를 받아 더 뿌듯했죠.

지난해부터 코로나19 상황이 계속되면서 방송사들도 여러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요. 특히 해외 촬영이 줄다 보니 번역가들에게도 타격이 클 것 같습니다.

지난해에는 정말 힘들었어요. 해외로 촬영을 나갈 수가 없으니 제 일도 같이 끊겨버린 거죠. 처음엔 잠시 쉬어가자고 생각했는데 이 상황이 언제 끝날지 기약이 없으니 점점 불안해지더라고요.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도서관에서 닥치는 대로 책을 빌려다 읽었어요. 그러다가 ‘나도 한번 책을 써 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어요. 제가 부산에서 청소년들과 함께 독서 모임을 하고 있는데, 독서 모임이 학생들을 얼마나 성장시킬 수 있는지 몸소 느꼈거든요. 독서 모임을 해야 하는 이유와 잘할 수 있는 노하우를 담은 책을 내 보자고 생각해 기획안을 썼고, 출판사 몇 군데에 보냈어요. 운이 좋게도 출판 제의를 받아 제 인생의 첫 책을 내게 됐습니다. 그 덕분에 방송 매체에 출연해 인터뷰도 하고 홍보 활동도 하느라 지난 한 해는 바쁘게 보냈습니다. 코로나19로 힘든 시간이었지만 또 다른 도전을 해볼 수 있었으니 감사한 마음을 가지려고요.
지금은 방송 번역 대신 OTT 플랫폼에 반영될 다큐멘터리 번역 작업을 하고 있는데요. 앞으로는 OTT 시장에서의 번역 작업이 더 많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요.

번역가로서 인생 2막의 마침표를 찍으실 건가요? 아니면 또 다른 일을 계획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앞으로 독서 모임과 관련된 활동도 더 해보고 싶고, 스페인어 공부도 계속하려고 해요. 예전에 페루를 여행하면서 스페인어에 관심을 갖게 됐는데요. 한동안 손 놓고 있다가 최근에 넷플릭스 드라마 <종이의 집>과 <마드리드 모던 걸>을 보면서 다시 스페인어에 푹 빠졌어요. 실력을 쌓아서 스페인어 콘텐츠 제작에도 참여하고 싶어요.
제가 여러 가지 일을 벌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저는 소심한 성격이라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걸 즐기지는 않아요. 하지만 좋아하는 일은 꾸준히 파고드는 편이에요. 좋아한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잖아요. 지금 제게는 그 일이 바로 ‘번역’이에요. 그래서 번역만큼은 정말 오래오래 하고 싶어요.

error: Content is protected !!
방송작가10월호_로고

방송작가 구독신청 / 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