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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뭐 봐?

‘만약’이라는 선물

영화 <패밀리맨>

요즘 뭐 봐?

‘만약’이라는 선물

영화 <패밀리맨>

한가람 한국방송작가협회 회원

  • JTBC 드라마 페스타 <한여름의 추억>
  • JTBC 월화드라마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
  • 저서 ≪단 한 끼라도 여기에서≫, ≪온통 너라는 계절≫

한가람 한국방송작가협회 회원

  • JTBC 드라마 페스타 <한여름의 추억>
  • JTBC 월화드라마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
  • 저서 ≪단 한 끼라도 여기에서≫, ≪온통 너라는 계절≫

해준   결혼하자, 우리.
여름   해준아. 나. 결혼 안 해. 너랑은.
해준   (약간 멍한 듯 여름을 보는데)
여름   나 욕심 많은 거 알잖아. 난 편하게 살고 싶어.

작가의 처녀작에는 자신의 경험이 오롯이 녹아든다는 말이 있다. 드라마 <한여름의 추억>은 나의 처녀작이었고 저 대사는 나의 경험에서 오롯이 녹아든 것이 맞다. 다만 주인공 한여름과 나의 다른 점이 있다면 여름은 해준에게 저리 말한 걸 죽을 때까지 후회하지만 나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라는 사람은 생각보다 뻔뻔한 편이고 내가 선택한 그 어떤 것도 후회를 하지 않는 성향을 가졌기 때문. 이런 나에게 사람들은 늘 시험하듯 물었었다. “너는 정말 그런 선택을 한 걸 후회하지 않니?”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은 항상 같았다. “응. 안 해.”
내가 지금껏 살면서 과거에 했던 선택 중 후회하는 것이 딱 하나 있다면 고등학교 때 친구를 따라간 목욕탕에서 면도기로 다리털을 밀던 친구에게 “야. 그거 원래 다 미는 거야?”라고 물었고 그녀가 “응. 모두가 밀어.”라고 대답하는 바람에 내 다리털을 몽땅 밀어버렸던 과거다. 그 년 아니, 그 친구 덕분에 나는 가만히 두면 사라질 수 있었던 다리털을 여전히 왁싱 하며 살고 있으니까.

아무리 그렇다 한들 어떻게 사람으로 태어나 후회를 전혀 하지 않은 채 살 수 있느냐 묻는다면, “누구든 내가 쓰는 방법이라면 그런 삶을 살 수 있다” 답하고 싶은데 일단 우리가 무슨 선택을 하느냐는 전혀 중요치 않다. 선택 그다음이 중요하다. 나는 일단 그렇게 하기로 결정한 이상 그것에 대해 미친 듯 최선을 다하는 편이다. 그렇다고 막 뼈를 깎고 살을 발라내는 노력을 하는 건 아니고. 딱 내 능력이 허락하는 거기까지만. 아주 몹시 열심히. 그렇게 했음에도 결과가 좋지 않은 경우도 물론 많았다. 보통 이 지점에서 사람들은 ‘후회’를 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나는 전혀 다른 걸 해왔는데 그것이 바로 정신승리다. 오. 나는 최선을 다했어. 그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치였다고. 나, 더는 못해. 고생했다. 자. 그럼 이만 안녕. 쾅! 문을 닫고선 그 결과를 다시는 들여다보지 않는 엄청난 정신승리. 이 과정대로 살면 놀랍게도 인생에서 후회라는 감정을 최소화시킬 수가 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데 참 익숙해진 난 과거의 저 날을 커다란 상자에 쑤셔 넣고 뚜껑을 꽉 닫은 뒤 테이프로 꽁꽁 싸매곤 다시는 들여다보지 않은 채 살아온 것이다. 하지만 이런 내게 여전히 사람들은 시험하듯 묻는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말이야. 그 사람과 헤어졌던 그 날로 돌아갈 수 있다면 너는 어떻게 할래? 넌 여전히 그날을 후회하지 않을 수 있겠니?” 그것에 대한 나의 대답은 언제나 같다. “응. 안 해. 그리고 세상엔 ‘만약’이라는 건 없어.”

브렛 래트너 감독의 2000년도 작품, 영화 <패밀리맨>은 내가 그렇게 없다고 믿는 그 ‘만약’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영화다. 뉴욕에서 크게 성공한 투자 전문 기업가인 잭은 맨해튼의 최고가 펜트하우스에서 살면서 고급양복을 입고 페라리를 모는 남부러울 것 없는 인생을 사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크리스마스이브, 우연히 식료품 가게에 들렀다가 총을 든 강도로부터 가게 안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구해낸다. 그는 다른 이도 아닌 강도로부터 너는 이걸 참 잘 해냈으니 이제 선물을 받게 될 거라는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잠이 드는데.

다음 날, 잭이 눈을 뜬 곳은 뉴욕에서도 한참 떨어진 뉴저지의 어느 작은 마을. 그곳의 좁고 낡은 이층집 허름한 침대 위. 잠들어 있던 잭의 얼굴을 마구 밟아대는 커다란 강아지와 샤워를 하면서 크게 노래를 부르는 아내. 그리고 기저귀를 갈라치면 오줌을 싸대는 작은 아이와 자신을 외계인이라고 생각하는 큰 아이에게 둘러싸인 완전히 달라진 자신의 인생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정확히 13년 전. 잭이 대형은행의 인턴십에 합격해 여자 친구인 케이트와 런던공항에서 이별하던 당시 케이트가 그를 붙잡으며 “정말 멋진 게 뭔지 알아? 지금 우리의 계획이 아니야. 그걸 버리고 우리가 함께하는 거야”라며 말했던 인생이었다. 하지만 잭은 그녀와 결국 헤어졌고 각자의 인생을 잘 살아왔다. 그런데 13년이 지난 지금 잭은 ‘만약에 그때 케이트와 헤어지지 않았더라면…’이 펼쳐진 세상에 와있게 된 것이다. 잭은 그렇게 케이트와 함께 하는 인생을 겪으며 13년 전과 똑같이 케이트를 사랑하게 되고 그녀를 선택한 인생에서 그녀의 말대로 ‘함께’라는 것에 만족감을 느끼게 된다.

영화는 그 과정을 제법 설득력 있게 그려내지만 왠지 염세주의자 및 물질 만능주의자인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잭! 잭아!! 너 정신 차려!! 너에겐 뉴욕 최고의 펜트하우스가 있다고! 야! 너 페라리 몰아. 저기요? 너 성공했거든요? 아니… 버리기엔 니 인생이 객관적으로 너무나도 괜찮은 인생이어서 그래.’ 그렇게 영화의 후반부까지 여전히 브라운관 안의 잭에게 ‘잭. 그거 아니야. 돌아가. 잭. 재엑? 잭!…’을 외치던 나를 단박에 설득시킨 건 거의 마지막 장면. 마침내 현실로 돌아온 잭이 현실의 케이트를 찾아가 13년 전의 그처럼 떠나려는 케이트를 붙잡으며 말한다. “지금 우리가 각자 갈 길을 가더라도 잘 살 수 있다는 걸 알아. 하지만 난 우리가 함께 있으면 어떻게 살 건지 봤어. 그래서 난 ‘우릴’ 선택하겠어”라고.

“있잖아. 만약에 네가 그때로 돌아가서 그 사람과,”
그래. 만약에 내가 그때로 돌아가 그 사람과 헤어지지 않는 선택을 했더라면. 그렇게 그 사람과 헤어지지 않은 내가 지구 어딘가에 살고 있더라면.
행복하기를.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행복하기를. 그와 내가 꿈꾸었던 작고 소소하지만 손톱 끝까지 뜨거웠던 그 세상에서 그렇게 영원토록.
난 여전히 ‘만약’이라는 말이 크게 소용없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걸 생각해서 뭐해. 속만 쓰리지. 다들 나처럼 박스에 넣어두고 다시는 열어 보지 마. 얼마나 편한 줄 아니?’하면서도 가끔. 그러니까 얇은 티셔츠가 온몸에 달라붙도록 땀이 나는 어느 저녁. 엘리베이터를 타고 쓰레기를 털레털레 버리러 가는 길. 여전히 매미 소리가 귀를 찌르는데 저 멀리서부터 알싸한 가을 냄새가 문득 바람을 타고 와 나도 모르게 코끝이 찡해져 버릴 때. 바로 그때 ‘만약에 내가 그때로 돌아가,’를 상상하면 덜 슬프기도 하니까. 그건 생각만으로도 어쩐지 내게 뜨거운 위로가 되어주기도 하니까.

잭은 케이트와 함께한 세상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았다. 식료품 가게에 있는 사람들을 강도로부터 구한 대가로. 영화 <패밀리맨>은 이제는 다 커서 크리스마스 선물 따위 받을 리 없는 우리들에게 ‘만약’이란 세상을 선물한다. 이 세상 어른들이 별다른 희망 없이도 이 세상을 꾸준히 견뎌낸 대가로.
나 역시 이 영화로 ‘만약’을 선물 받았다. 마음이 아주 외로운 날. 내가 영영 보지 않길 바라는 어느 세상을 가끔은 꿈꾸고 그곳의 나는 잘 살고 있을 거란 위로를 스스로 하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여름이처럼 그 사람에게 “미안해”라고 사과를 한 듯한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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