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작가

특집1_사용2

유성운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

  • 저서 ≪걸그룹 경제학≫, ≪리스타트 한국사 도감≫, ≪사림, 조선의 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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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범죄물에 빠지다

방송, '범죄'를 팝니다

특집1_사용2

유성운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

  • 저서 ≪걸그룹 경제학≫, ≪리스타트 한국사 도감≫,
    ≪사림, 조선의 586≫

“아버지가 5살짜리 아이를 목검으로 때려 숨지게 한 사건인데요.” (정재민 법무심의관)
“아이의 친모는 이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했나요?” (윤종신 가수)
“엄마도 구타를 당해서 보호소로 갔고…” (정재민)
“부인도 폭력을 당하고 아이도 당했잖아요. 차라리 아이라는 희생양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엄마로서 하기 힘든 생각이지만…” (박지선 범죄심리학자)
마치 카페에서 지인들과 만나 자연스럽게 주고받는 듯 대화가 이어진다. 아동 학대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범죄의 잔혹성에 대한 성토보다는 사건에 대한 이해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 최근 막을 내린 tvN 예능프로그램 <알아두면 쓸 데 있는 범죄 잡학 사전-알쓸범잡>의 일부다. 제목에서 추측할 수 있듯 tvN의 대표적 인포테인먼트(인포메이션+엔터테인먼트) 예능인 <알쓸신잡>의 범죄 버전이다.

범죄물, 인포테인먼트라는 새 옷을 입다

요즘 TV에서 채널을 돌리면 범죄를 다룬 콘텐츠를 만나는 것이 어렵지 않다. <알쓸범잡> 외에도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당신이 혹하는 사이> 등 범죄 예능이 우후죽순 생겨나 자리를 잡고 있다. 드라마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JTBC <괴물>, SBS <모범택시>, tvN <마우스>, tvN <낮과 밤> 같은 범죄 드라마들이 시청자들로부터 반응을 얻고 있다. 그렇다면 범죄물은 왜 요즘 이토록 잘 팔리는 걸까.
사실 범죄물 자체에 대한 관심 자체를 최근 갑자기 나타난 독특한 현상이라고 치부하기는 어렵다. 과거 시리즈나 근래의 BBC <셜록>의 인기를 보더라도 잘 만들어진 범죄물은 늘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마련이다. 한국의 방송 콘텐츠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1970~1980년대 MBC <수사반장>과 KBS <형사 25시>처럼 실제 범죄를 모티브로 만든 형사 드라마가 대표적이다. 특히 <수사반장>은 종영된 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회자될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다. 이후 1993년 방영한 MBC <경찰청 사람들>은 범죄 사건을 재연하면서 실제 사건을 담당했던 경찰관이 출연하는 방식으로 주목을 받았다. 2015년에도 <경찰청 사람들 2015>가 새로 제작되기도 했다. 그 외에도 SBS <그것이 알고 싶다>나 MBC <PD수첩>처럼 사회적으로 이슈가 된 사건을 추적하는 교양 프로그램도 오랜 기간 자리를 지키는 중이다. 이렇듯 범죄물은 흥미와 자극성이라는 요소 때문에 일찌감치 방송계의 ‘킬러 콘텐츠’로서의 역할을 했다.

(좌) MBC <수사반장>, (우) tvN <알쓸범잡> 화면 갈무리, 필자 제공

하지만 최근 등장한 범죄 예능프로그램은 ‘범죄’라는 재료를 다루긴 하지만 조리 방식이 사뭇 다르다. 윤종신, 송은이, 봉태규, 장도연, 권일용 프로파일러, 장항준 감독, 박지은 범죄심리학자, 정재민 법무심의관 등 대중적 인지도 높은 연예인과 범죄 관련 전문가들이 함께 출연하고 ‘토크+정보’로 구성돼 범죄물임에도 분위기가 딱딱하거나 어둡지만은 않다. 범죄에 대한 각종 지식과 경계할만한 유의사항 등을 알려주는 전형적 ‘인포테인먼트’이다.
프로그램에서 다루는 사건들은 가볍지 않다.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 피살 사건이나 제주 4·3사건처럼 근현대사의 묵직한 장면부터 지존파 사건, 여대생 공기총 청부살인 사건, 연쇄살인마 유영철 사건 등 일반인들의 모골을 송연하게 만들었던 범죄도 다루고 있다. 그렇지만 앞서 설명했듯이 이전에 내놓았던 범죄물들보다는 트렌디한 구성으로 일반 시청자 입장에서는 분식처럼 부담이 적고 소화하기 좋게 짜여 있다. 볼륨을 끄고 화면 속 스튜디오 분위기만 보면 범죄물인지 토크쇼인지 잘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이다.

사회문제를 향해 높아진 대중의 관심도

이와 같은 새로운 범죄 예능의 등장 배경으로 전문가들은 시대적 분위기를 꼽고 있다. 과거에는 주요 언론매체가 다루지 않으면 사건 당사자 외에는 모르고 넘어가는 사건·사고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엔 상황이 달라졌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의 발달로 억울함을 호소하는 그 자체로 국민적 관심을 모을 수 있게 됐다.
예를 들어 여자배구단 흥국생명 스파이더스의 이재영·이다영 자매의 학교폭력 논란은 무려 10년이나 지난 시점에 과거 중학교 시절 동창의 SNS 폭로로 시작돼 스포츠계는 물로 연예계까지 확산했다. 이 과정에서 KBS 드라마 <달이 뜨는 강>에 주연으로 출연 중이던 배우 지수는 중도하차라는 전례 없는 상황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과거 같았으면 술자리의 ‘뒷담화’로 그쳤을 청소년기의 경범죄도 어떤 나비효과로 이어질지 모르는 시대인 것이다. 하재근 대중문화평론가는 “최근 층간 소음 같은 가벼운 이슈부터 아동 학대 같은 무거운 이슈까지 사회의 각종 사건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가 높다. 스스로 ‘수사’를 해서 댓글에 올리기도 하고, 증거 확보에 나서기도 한다”며 “예능 역시 이런 흐름에 발맞춰 가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여기에 동물권·여성 등에 대한 기준이 과거보다 엄격해진 것도 범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는 데 영향을 줬다. 또한, 코로나19로 인해 해외여행과 외출 등이 제약을 받으면서 갈수록 ‘내부’로 시선이 향하는 지점도 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국내에 머무르면서 재택근무는 늘어나고 혼밥도 많아진다. 필연적으로 SNS나 인터넷 등을 살펴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사건·사고 소식에 더 이목이 집중될 수 있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보다 더 중요한 정서가 자리 잡고 있다고 본다. 그것은 요즘 시대의 화두라고 불리는 ‘공정’이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방송이 항상 뜨거운 소재를 다루는 건 교양이든 예능이든 드라마든 다 비슷한데, 요즘 범죄에 대한 대중의 시선과 관심도가 높아져 있다”면서 “아동 학대나 한강 대학생 사망 등의 사건을 보면서도 ‘내 주변에서도 벌어질 수 있다’는 경각심과 함께 ‘내가 지켜주지 못했다’는 부채감에서 높은 관심이 기인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 안에서 찾고자 하는 또 다른 숨은 코드는 ‘정의’다. 법 정의가 제대로 서 있지 못하다는 의구심이 대중에 퍼지면서 이런 콘텐츠가 높은 반향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얼마 전 종영한 SBS 드라마 <모범택시>는 택시회사 무지개 운수와 택시기사 김도기가 억울한 피해자를 대신해 복수를 해주는 내용이다. 공권력이 공정하게 작동된다는 신뢰가 낮아진 시대인만큼 법 테두리를 벗어난 사적 복수에 대해서도 정서적으로 공감하게 된다는 것이다. 폭발적인 인기를 누린 SBS <펜트하우스>도 마찬가지다. 3개의 시즌 동안 수많은 범죄가 벌어졌지만 공권력은 부수적 존재에 머무를 뿐이다. 범죄와 악한들을 심판하는 주체는 따로 있고, 복수의 강도가 높아질수록 대중들은 환호하고 있다.

범죄의 연성화와 팩트 여부에 대한 우려

하지만 이러한 시도들이 자칫 ‘범죄의 연성화’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예를 들어 앞서 언급한 범죄 예능프로그램 <알쓸범잡>은 사건이 일어난 지역을 찾아가는데, 일대의 풍광을 담기도 하고, 식당이나 카페에서 촬영하며 얼핏 보면 여행 예능과 접점을 시도한 듯한 느낌도 든다. 출연자들끼리 사소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음을 유도하기도 한다.
하재근 평론가는 “<썰전>처럼 정치도 다양한 포맷으로 다뤘는데, 범죄라고 해서 그렇게 되지 말란 법은 없다”고 전제하면서도 “하지만 자칫 범죄 자체의 자극성을 이용하지 않기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진지하게 다룰만한 의미가 있는 사건만을 다루고 거기서 사회가 경계할만한 메시지들을 뽑아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팩트와 의견을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정덕현 평론가는 “많은 사람이 의문을 갖는 사건에 대해 간혹 음모론적인 시각으로 접근하게 되는데, 그런 경우는 ‘우리의 상상입니다’라는 메시지를 정확하게 전달해야 한다. 이렇게 안전장치를 만들고 전달해야 불필요한 사회적 갈등을 만들지 않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최근 한강에서 있었던 대학생 손모 군의 사망 사건을 놓고 극심한 진통을 겪었던 것을 감안하면 간과하기만은 어려운 제언이다. ‘뇌피셜’을 던지며 수많은 의혹을 양산한 유튜버들의 행태도 문제였지만 사건 초기 기존 언론들도 ‘시나리오’를 양산하는 데 힘을 보탠 것은 아닌지 반성할 지점이 있다.

지구에서 범죄 예능이 엄격하게 금지되는 곳은 공산주의 또는 일부 강력한 신정일치 국가들이라고 한다. 거기에는 종교적 교리 문제나 사회에 대한 불안 조성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을 것이다. 역으로 말하면 범죄 예능의 다양한 변주는 우리 사회의 자유와 성숙도를 나타내는 하나의 척도라 할 수 있다. 다만 자칫 잘못 다룰 경우에는 그로 인해 치러야 할 사회적 비용이 만만치 않은 만큼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점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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