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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공감

우유와 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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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와 불안

정윤미 한국방송작가협회 회원

  • KBS <명견만리> <시사직격> <다큐 인사이트>

정윤미 한국방송작가협회 회원

  • KBS <명견만리> <시사직격> <다큐 인사이트>
작가공감-우유와불안
우유와 불안. 필자 제공
지독하게 체했다. 아침에 차가운 우유를 벌컥벌컥 마신 게 화근이었다. 아침잠이 많은 편인데 이날따라 이상하게 일찍 눈이 떠졌다. 목이 말랐고 배도 조금 고팠다. 식빵에 딸기잼을 바르고 치즈를 한 장 올렸다. 빵을 한 입 베어 물 때마다 냉수 마시듯 우유를 마셨다. 간만에 갖게 된 아침이니 여유를 부려도 좋았을 텐데 나는 뭔가에 쫓기듯 서둘러 먹고 마셨다. 마지막 우유 한 모금을 마시고 컵을 내려놓았을 때 명치끝이 묵직해지는 게 느껴졌다. 식도를 타고 내려간 음식물이 가슴 한복판에 걸려 있는 기분이었다. 더부룩하고 불쾌한 느낌. 그러나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평소에도 소화가 잘 되지 않아 소화제를 달고 살았다. 소화력이 입맛을 따라가지 못해 입이 원하는 대로 다 먹으면 늘 체했다. 그러니 우유 몇 잔에 체했다고 해서 그리 대수로운 일은 아니었다.
점심을 건너뛰고 저녁이 되었는데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따뜻한 물 한 잔을 마시고 일찍 잠들었다면 아마 다음 날 아침 말짱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미련한 선택을 하고 말았다. 부득부득 저녁을 챙겨 먹었다. 전날 끓여둔 쇠고깃국에 밥을 말아 먹었다. 배가 전혀 고프지 않았는데 막상 밥을 먹으니 입맛이 돌았다. 숟가락에 김치를 돌돌 말아 올려 국 두 그릇을 비웠다. 이렇게 악착같이 먹은 데엔 이유가 있었다. 살이 빠지지 말아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깡마른 몸을 가졌다. 어렸을 땐 날씬하다 정도였는데 나이가 들수록 ‘말랐다, 빼빼 말랐다, 쓰러질 것 같다’의 단계로 진화했다. 먹는 걸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편식을 하는 것도 아닌데, 먹는 게 다 어디로 가는지 모를 만큼 살이 찌지 않았다. 마른 몸에 대한 고민을 얘기하면 친구들의 반응은 대개 비슷했다.
“살찌는 것만큼 세상에서 쉬운 일이 없는데.”
두 달 전, 하고 있던 프로그램을 그만두었다. 며칠씩 밤을 새워 방송을 내고 나면 일주일은 비실댔다. 젊은 날 비축해 둔 체력이 바닥이 드러내고 있었다. 쉬는 동안의 유일한 목표는 살을 찌우고 체력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계획했던 만큼 운동을 하지는 못했지만 게으른 삶을 살다 보니 조금은 살이 붙었다. 그렇게 붙은 살이 너무 귀했다. 그러니 조금 체했다고 해서 저녁을 거르는 일을 감행할 수는 없었다. 고깃국으로 배를 채우고 잠든 다음 날 결국은 사달이 났다. 배속에 돌멩이가 가득 찬 것처럼 속이 갑갑했다. 하필 주말이라 문을 연 병원도 없었다. 까스활명수와 생강차, 양배추로 주말을 버텼다.
월요일 아침 병원을 찾았을 때 의사는 배를 꾹꾹 눌러보더니 말했다.
“일주일 치 약 드릴게요. 당분간은 죽 드시고요.”
일주일을 금식하듯 보냈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도 속은 나아지지 않았다. 조금 괜찮아졌나 싶어 밥을 먹으면 이내 소화가 되지 않았다. 다시 병원을 찾았을 때 의사는 일주일 치 약을 더 처방했다. 왜 이렇게 낫지 않는 거냐고 묻자 의사는 ‘나아지고 있다’고 답했다. 평소에 소화 기능이 약해서 회복이 더딘 거라고. 조금 천천히 지켜보자고 했다.
프로그램을 그만두고 휴식시간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마음은 더 바빴다. 봐야 할 책과 영화, 그간 놓친 TV 프로그램들이 숙제처럼 눈앞에 있었다. 마음이 바쁘다고 몸이 따라주는 것은 아니었다. 오랜 불면증으로 늘 늦잠을 잤고, 점심 한 끼를 차리고 나면 하루는 속절없이 흘렀다. 쉬는 것도, 쉬지 않는 것도 아닌 날들의 반복이었다. 그 사이 마음속에선 불안이 싹텄다. 정신없이 일만 할 땐 소처럼 살다 늙어 죽을까봐 불안했고, 일을 쉴 땐 일조차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불안했다. 어느 쪽을 택하든 나는 늘 불안했다. 생각해보면 이 불안은 나의 깡마른 몸과 허약한 위장과 무관하지 않다.
오늘로써 위염 3주 차를 맞았다. 2주간 착실히 약을 먹었고, 속은 아주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 그래도 괜찮다. 더딘 회복도 있는 거라고, 나아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거라고 나는 믿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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