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작가

지금 이 작품

남은 삶을 향한 위로

KBS <오월의 청춘> 이강 작가

김선미 편집자 사진 제작사 ‘이야기 사냥꾼’ 제공

지금 이 작품

남은 삶을 향한 위로

KBS <오월의 청춘>
이강 작가

김선미 편집자
사진 제작사 이야기 사냥꾼 제공
스무 살 여름방학의 배낭여행. 광주 5·18자유공원에서 본 사망자의 시신을 쌌던 얼룩진 태극기를 선명히 기억한다. 그리고 그 옆, ‘길거리의 수백 명의 학생과 시민’이 아닌 분명히 그 누구보다도 뜨겁게 살아 숨 쉬고 있었을 수백 명 각각의 이름 석 자가 새겨진 석판은 그날 오후 내내 마음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랬다. 그곳에 가족, 연인, 친구가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고, 봄바람에 날리는 꽃잎들처럼 하릴없이 스러져 갔다.
1980년 광주의 5월. 보안부대 대공수사과 과장의 아들 희태(이도현 분)는 부모들끼리 마련한 강제 맞선 자리에서 수련(금새록 분) 대신 대타로 나온 명희(고민시 분)와 운명처럼 만나게 된다.
원래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으로 기획된 작품이었어요. 처음에 제안을 받았을 땐 못 하겠다고 말씀을 드렸죠. 그런 역사를 다룰 만한 그릇이 못 된다 생각했거든요. 사실 그동안 봐왔던 5·18 이야기들은 영웅적이고 장엄하게 그려진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저조차도 뭔가 경직되는 게 있기도 했고요. 그랬더니 저한테 그런 걸 원하는 게 아니라고, 그냥 제 그릇에 맞는 따뜻한 사람 이야기를 하면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대학을 졸업하고 2년이 채 되지 않았던 시점에 2013 KBS 극본공모에서 단막드라마 최우수에 당선됐다. 당선작 <다르게 운다>를 비롯해 <액자가 된 소녀>, <아득히 먼 춤>, <집우집주>, <사교땐스의 이해> 등 KBS 드라마스페셜 다수를 집필했고, 2015 금요드라마 <스파이>의 공동집필자이기도 했다. 누가 봐도 빠른 데뷔였고 여러 차례 단막극의 기회가 주어지긴 했지만 미니시리즈로 단독 집필작을 내기까지는 우여곡절도 많았다. <오월의 청춘>은 몇 차례 작품이 엎어진 끝에 만나, 배우들과 제작진들과 진심을 모아 결실을 이뤄낸 소중한 작품이다.
자료조사를 시작해봤더니 민주화운동의 최전선에 나섰던 분들이 아니더라도 너무너무 평범한 많은 분들이 희생을 당했는데, 한 분 한 분의 이야기가 정말 이런 멜로가 없고 이런 슬픈 가족극이 없는 거예요. 너무 드라마 같은 이야기들을 다들 가슴에 품고 지내고 계셨어요. 희생된 이 평범한 사람들에 집중을 해야겠다 생각했죠.
열세 살 명수의 눈으로 바라본 광주민주화운동을 그려낸 원작 ≪오월의 달리기≫(김해원 작가)와는 다르게, <오월의 청춘>에서는 명수의 누나 명희와 희태, 수련, 그리고 수련의 오빠 수찬까지 인생의 가장 봄날을 보내고 있는 청춘들에게로 중심이 옮겨간다. 그랬다. 그날에도 여느 이들처럼 꿈을 꾸고, 사랑을 갈구하는 눈부신 청춘들이 있었다. 간호사인 명희는 과거의 상처를 잊으려 노력하며 유학의 꿈을 품은 채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었고, 현실의 벽에 부딪히면서도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가는 마음에 두 사람은 좀처럼 서로의 손을 놓지 못한다.
시대극이고 역사적인 사건을 배경으로 다루고 있지만, 그 역사를 다루는 방식에 대해서는 항상 ‘밀물처럼 가자’라고 얘기를 했었어요. 1화를 보면 ‘이게 5·18 이야기야?’ 싶을 거예요. 그걸 의도했고요. 왜냐면 숲 안에 들어가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시대를 느끼면서 살고 있지 않거든요. 유학이라는 목표, 이송시켜야 할 친구 등 바로 옆에 있는 나무들이 더 크게 보이죠. 그런데 어느 순간 봤더니 내 발목부터 물이 찰랑찰랑 차올라 있는 거예요. 시청자들도 그런 느낌으로 봐주셨으면 했었어요. 이게 역사극이라 인식하지 않고 그냥 주인공들의 사랑 이야기로. 그게 어떻게 보면 한 시대에서 사람들이 그 역사를 겪는 방식이라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5월 18일이라는 날짜가 갖는 상징성이 큰 탓에 마치 그날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뒤바뀌어버린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이강 작가가 자료조사를 하면서 보게 된 것은 광주가 천천히 무너져가는 과정이었다.
18일은 오히려 사람들이 잘 몰랐어요. 금남로라든지 전대 앞에서 치열한 시위가 있었던 것 외에는 그냥 뭔 일이 있다던데 정도. 그런데 전화가 끊기고, 버스가 끊기고, 신문이 끊겨요. 어느 시점을 넘어가면 완전히 고립이 돼서, 시내에는 군인도 없어요. 그게 되게 오래 지속이 되고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고 이러다 보니까 사람들이 ‘어, 뭔가 이상한데?’ 생각하면서 점점 모두의 일이 되고 퍼져나가는 형상인 거예요. 마치 전쟁이 난 것처럼 모든 도시가 아예 순식간에 정지가 된 건 아니었어요. 조사하기 전엔 저도 정확히 몰랐던 사실이었죠. 차근차근 무너져나간다는 느낌을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21일에서 22일에 완전히 봉쇄를 하기 위해서 시내에 있던 계엄군들이 다 밖으로 나가게 되거든요. 사람들은 처음엔 이게 해방인 줄 알아요. ‘해방 광주’ 기간이라고도 부르죠. 왜냐면 우리가 물러나라고 했는데 물러났으니까. 이런 상황을 대본에서 희태와 기남(희태 부/오만석 분)의 관계로 표현을 했어요. “이제 광주는 뒤주에 갇힌 꼴이 됐어. 굴복할 때까지 천천히 말라 죽겠지, 지금의 너처럼”이라고.
명희는 자신을 위해 평생 바람막이 같은 인생을 살아온 아버지처럼, 위기의 상황에서 동생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으며 계엄군에 의해 희생된다.
명희는 아버지의 딸이기도 하고, 명수의 누나이기도 하고, 수련의 친구, 병원의 동료이기도 하죠. 심지어 이제 희태의 사랑이기도 한데, 가장 많은 인물들과 엮여있는 이 한 사람이 사라짐으로써 너무나 많은 ‘남아있는 자들’을 만들어내게 돼요. 사실 저는 이 이야기를 하면서 죽음을 최소화하고 싶었어요. 많은 분들이 돌아가신 일이긴 하지만, 그냥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남아있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굳이 많은 사람을 죽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가장 많은 사람들과 엮여있던 명희가 아무것도 없었던 희태에게 자기 관계들을 다 넘겨주고 간 거나 마찬가지라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남아있는 사람들끼리의 연대에 대해서도 생각했던 부분이에요.
남겨진 희태는 명희의 시신을 찾지 못한 채 40년의 세월을 견뎌낸다. <오월의 청춘>은 남겨진 이들을 위한 조심스러운 위로다.
마지막 회에서 희태가 죽지 못하고 바닷가에 앉아 멍하니 바라보는 장면이 있어요. 남아있는 자가 고통의 정점에 있는 모습이었죠. 너무 잔인한 결말로 인물들을 끌고 가다 보니 너무 괴로웠는데, 결국에는 남아있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쓰려고 했고 또 그분들에게 위안이 되는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게 너무 컸기 때문에… 저는 그 위안이 드라마를 본 시청자들이 자기 일처럼 슬퍼하면서 남은 분들의 슬픔에 대해 갖는 공감에서 온다고 생각했어요. 마지막 회에 ‘5·18은 간첩의 소행이다’ 이런 내용이 쓰인 현수막이 걸려있는 장면이 나오는데, 시정차분들이 그 장면에서 굉장히 분노하시더라고요. 같이 분노해줄 사람이 있다는 것이 현실에 있는 분들한테는 어떤 위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주님, 예기치 못하게 우리가 서로의 손을 놓치게 되더라도, 그 슬픔에 남은 이의 삶이 잠기지 않게 하소서. 혼자 되어 흘린 눈물이 목 밑까지 차올라도, 거기에 가라앉지 않고 계속해서 삶을 헤엄쳐 나아갈 힘과 용기를 주소서.” – 명희의 기도 2021년, 41년의 기다림 끝에 명희의 유골이 발견되면서 희태는 첫 번째 오월을 맞이했다고 말한다. 명희를 찾은 첫 번째 오월, 그리고 희태가 명희의 기도대로 살아가게 될 남은 날의 첫 번째 오월. 지금까지도 매년 사무치는 5월을 맞이하고 있는 우리 현실 속의 ‘남겨진 이들’이 하루빨리 희태와 같이 새 오월을 맞이할 수 있길, 그때까지 힘과 용기를 잃지 않고 삶을 지켜내길 간절히 바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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